제 1 面
남자는 온통 검은색 세게에서 눈을 떴다.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고막에선 묵직한 심장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가에 가득 고인 눈물은, 장력을 이루다 이내 흘러내린다. 관자놀이 위로 눈물에 뒤섞인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의 등 뒤로는 서늘한 축축함이 느껴졌다. 온몸은 땀에 젖어 무겁고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게 남자는 다시 한 번, 온통 검은색 세계를 바라보고 누워있었다.
얼마인지 모를 시간이 흐르고, 그의 몸은 어느새 정상적인 리듬을 회복하였다. 남자는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침대의 왼쪽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고개를 떨구고, 펼쳐진 두 손바닥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단전에서부터 목젖까지 차오른 감정들이 울렁거렸다.
“나는 무엇을 보기 위해서 눈을 떴지?”그가 물었다.
그는 한참동안 생각해보지만, 그의 머릿속엔 어떠한 형상도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는 천천히 어둠 속에서 일어나 익숙한 동선을 따라 왼쪽으로 다섯 걸음을 옮겼다. 팔을 뻗어 두꺼운 암막 커튼을 움켜쥐고, 조심스럽게 그것을 반쯤 걷어냈다. 창밖에서 그를 기다리던 햇살들이 그의 시야를 지나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차갑고 어두운 방 안 구석구석으로 빛과 온기가 스며들고, 그의 등 뒤로 어둠속에 자취를 감췄던 사물들이 피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오롯이 그의 발끝에 사선으로 걸친 작은 빛에만 머물러 있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감옥같은 창살들을 겸비한 회색 건물들은, 매일같은 메마른 하루를 약속하는 듯 했다.
남자는 뒤를 돌아 침대 옆 책상 위에 놓인 디지털 시계를 확인했다. 10.15. MON. 14:27. 그는 멍하니 서서 시계에서 흘러나오는 파란 불빛을 응시했다. 마치 그곳에 잃어버린 것이라도 있는 듯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오늘이 매달 참석하기를 권고 받은 정기검진이 있는 날임을 기억했다.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지만, 그는 오늘 해야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기 때문에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멈춰 서서 입고있던 옷과 속옷을 벗어두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는 정면에 있는 거울을 의식적으로 외면하며 샤워 부스로 향했다. 물을 틀고, 아무렇게나 물방울들이 그의 기름진 머리카락과 시큼한 살결을 씻겨 주기를 기다렸다. 얼굴을 포함한 온몸에 샴푸 칠을 하고, 거품이 몸에서 씻겨져 나가기를 기다렸다. 샤워를 마치고 그는 벽에 걸린 며칠 쓴지 모를 퀴퀴한 냄새가 나는 수건으로 몸을 닦은 후, 남은 물기를 흩뿌리며 화장실을 나섰다.
그는 화장실 앞 건조대에 걸린 팬티 한 장을 집어 입었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가 화장실과 침대 사이에 놓인 1인용 소파 앞에 멈춰섰다. 소파 위엔 언제 벗었는지 모를 옷가지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그는 고민 없이 가장 위에 놓인 검은색 후드티와 검은색 반바지를 집어입었다. 준비를 마치고 적막한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발 밑에 제멋대로 벗겨져 있는 슬리퍼를 신고 집을 나섰다.
건물을 나서면서 남자는 후드를 뒤집어 쓰고, 후드티에 뚫려있는 주머니 사이로 양손을 집어 넣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눈동자와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면서 걸었다.
첫 번째 블럭을 지나치고, 두번째 블럭을 지나쳤다. 남자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서서 다음 목적지를 확인하기 위해 눈을 치켜 뜨고 앞을 보았다. 건너편 건물의 1 층엔 카페가 있었다. 그리고 카페의 창가에는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여자 한 명이 그를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신호가 바뀌고, 남자는 계속해서 그의 발끝을 바라보며 앞으로 걸었다. 아스팔트 도로 위에 여자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식은땀이 흘렀다.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시선은 카페와 가까워질 수록 더욱 더 그의 머리를 땅으로 짓눌렀다. 카페를 지나치는 순간, 남자는 고개를 돌려 여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여자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다만 그는 그녀의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에 섬뜩함을 느끼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남자는 계속해서 걸었다. 그의 목덜미에서는 여전히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차가운 땀방울이 그의 척추를 타고 내려와 엉덩이 골 사이로 흘러내렸다. 남자는 가던 길을 멈추고는 서둘러 눈 앞에 보이는 골목으로 도망치듯 여자의 시선을 벗어났다.
큰 길로 향하는 골목의 끝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그는 아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더욱 더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걷고, 계단을 내려가고, 역사의 통로 안의 사람들을 지나쳤다. 역무원이 보이는 거리에서는 수상해 보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들고 허공을 바라보며 걸어야만 했다.
평일 오후의 지하철은 한가로웠다. 그는 텅 빈 지하철 칸에 홀로 앉아, 건너편 좌석 위 유리창에 비친 그의 모습을 마주보고 가고 있었다. 굽은 등, 축 쳐진 어깨, 여전히 숙인 고개, 힘 없이 왼쪽으로 기울어진 머리, 앞을 보기 위해 치켜 뜬 두 눈, 그를 바라보는 텅 빈 눈동자들, 그리고 터널 안 어둠 속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는 그의 공허한 얼굴.
남자는 덜컹거리며 움직이는 지하철 소리를 들으며 그의 몸이 어디론가 운반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세상은 멈춰있었다. 그의 세상은 과거의 어느 시간 속에 머무르며 더 이상 그를 따라오지 않았다. 그의 세상은, 그의 몸뚱어리만 이곳에 남겨둔 채 먼저 죽어버렸다. 세 정거장 후, 남자는 지하철에서 내려 사람들 사이를 유령처럼 지나 출구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는 계속해서 쉬지 않고 병원으로 향했다.